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헨리 8세 (문단 편집) == 기타 == * 파란만장한 사건들로 가득한 헨리 8세의 치세기는 후세의 창작자들에게도 많은 영감을 제공하여, 오늘날에도 수많은 작품들을 통해 그 흔적을 확인할 수 있다. 6명의 부인에 관한 일화와 영국사에 별로 없는 절대군주의 이야깃거리를 남겨서인지 오늘날 영국에서도 사극이나 역사소설에서 인기 단골로 등장하는 배경이 헨리 8세 시대이다. * 살아생전 사람을 엄청 많이 죽였다. 아내를 갈아치우고 죽이는 일로만 유명했지만 일반 백성들을 정말 많이 죽였는데 그가 죽인 사람 총합은 [[https://www.youtube.com/watch?v=p4Sr79gXYEU|72,000명]]에 달한다. * 무술에도 관심이 많아 본인이 직접 갑주를 입고 말을 타며 무술 단련을 하고, 마상 시합에도 참여하기도 했으며, [[헨리 8세의 하마 전투용 갑옷|하마 전투용 갑옷]]과 [[헨리 8세의 강철치마 갑옷|강철치마 갑옷]], 기타 호화로운 야전용 갑옷(Field Armour)을 포함해 수많은 무구들을 남겼다. * [[사생아]]로 리치먼드, 서머싯 공작 헨리 피츠로이가 있었으나 그 역시 16세에 요절한 이복동생 [[에드워드 6세]]처럼 17세쯤에 요절했다. * 잉글랜드의 느슨한 관습법으로 존재하던 <[[소도미법]]>을 본격적으로 공식화하여 동성애를 한 귀족을 교수형에 처하게 만든 인물이기도 하다. * 영국의 로열메일과 [[케임브리지 대학교/출판부 및 시험개발원|케임브리지 대학교 출판부]], [[케임브리지 대학교]] [[케임브리지 대학교/컬리지#트리니티|트리니티 컬리지]]를 창립하기도 했다. * 엄청난 미식가이자 대식가였다고 한다. 특히 식사를 하면 하루에 접시를 20개나 비웠을 정도라고 한다. 한 귀족이 헨리 8세의 변을 치우는 일을 했는데, 다른 귀족들이 "그런 '''영광스런''' 일을 해서 어떠냐?"[* 현대인에겐 무슨 비아냥처럼 들리지만, 전근대에 왕과 같은 권력자의 배설물을 치우는 것은 농담이 아니라 '''아주''' [[높으신 분들]]이나 맡을 수 있는 일이었다. [[어의]]처럼 국왕의 몸에 손을 댈 수 있고(이럴 수 있는 보직이 의외로 흔한 게 아니다!) 국왕의 가장 사적인 공간을 공유하는고로 국왕과 왕실의 개인사와 비밀, 정치·행정 업무를 쉽게 알 수 있기 때문이다. 당연히 아무에게나 맡기지 않았으며(헨리 8세의 담당관도 무려 '''후작이다.'''), 거기에 국왕의 건강상태를 가장 가까이에서 확인하는 자리이므로 왕이 그 사람을 전폭적으로 신뢰할 수 있다는 뜻이 되기에 누릴 수 있는 권세도 대단했다. 지도자의 건강상태는 주요한 국가기밀이며, 이는 현재도 마찬가지란 건 생각해보면 이 자리는 절대 아무에게나 줄 수 있는 자리가 아니었다. 엘리자베스 1세 역시 부왕 헨리 8세처럼 귀족에게 용변을 맡겼고, 헨리 8세의 이후 시대 인물인 [[루이 14세]]의 경우에도 그의 요강을 담당하는 일은 고위 귀족이 맡았다. 조선에서도 왕의 변을 내의원에서 맛보고 연구했을 정도.]고 묻자 '''"뭐 왕이 대식가인건 알겠다"'''고 답했을 정도. 워낙 많이 먹다보니 용변을 보는 횟수도 많았기 때문이다. 그나마 젊은 시절에는 운동을 열심히 하면서 나름 체중관리를 했으나, 마상시합 중 낙마사고로 다리를 다친 이후에는 운동도 제대로 할 수 없었던 탓에 폭식을 하다보니[* 그것도 기름지며 단 음식을 매일 먹으니 비만이 심해질수밖에 없었다.] 점점 살이 쪄서, 노년에는 허리둘레가 54인치(140cm)에 가까웠다고 한다. 헨리 8세의 옷 한 벌에 남자 셋이 들어간다는 얘기가 있었으니. * 6명에 달하는 아내들의 면모를 살펴보면 기묘하게도 일정 부분의 패턴이 있다. * 이혼→ 처형→ 병사의 단계를 반복하였다. * 이혼한 왕비들과 처음 결혼할 때는 둘다 정치적인 요소가 매우 강하게 작용했다([[아라곤의 카탈리나]]-스페인과의 관계 문제, [[클레페의 앤]]-독일의 개신교 제후들과의 동맹 시도). * 처형당한 왕비들의 처형 명목은 둘 다 다른 남자와 놀아났다는 [[간통죄]]였다. * 병사한 아내들의 사망 원인은 모두 [[출산]] 후유증으로 인한 [[산욕열]]이었다. 단, 마지막 아내인 [[캐서린 파]]는 헨리 8세가 사망한 후에 재혼했다가 출산한 것. * 다만 이런 '패턴의 반복'은 단순한 우연의 일치나 [[징크스]]라기보다는 일정 부분에 대해서는 헨리 8세의 행동에 따른 필연적 결과였다고 볼 여지가 있다. 말하자면 '''일국의 왕 답게 [[정략결혼]]을 한 상태에서 톡톡 튀는 매력을 가진 새 여자에게 빠져 새 장가를 들고 싶어진 것'''이다. 그런데 왕과 정략결혼을 할 정도로 '''강력한 정치적 배경을 가진 통치가문의 딸을 쉽게 치워버릴 수는 없다'''. 그나마 정치적인 부담을 최소화하기 위해서는 '''정식으로 이혼하여 공식적으로 상황을 정리'''해야 하는 것. 그런데 처음에는 이 난리법석을 벌여가며 맞이한 새 왕비의 파격적인 매력에 푹 빠져 있었지만, 시간이 흐르자 그 '''파격성이 오히려 피로감을 불러일으켜 관계가 파탄'''에 이르게 된다. 즉 속된 말로 하면 '질렸다'. 그렇다고 또 이혼 소동을 벌이면 망신도 이만저만이 아니겠지만... 이번 왕비는 정치적 배경이 아니라 이성적 매력 덕분에 왕비가 된 케이스라 왕의 총애 이외에는 별 힘이 없으므로 정치적 부담 없이 '''치워버리는 것이 가능하다'''. 그 핑곗거리가 간통죄가 된 것 역시, (왕비가 정말로 국왕 시해 음모라도 꾸민 것이 아닌 이상) 왕비의 간통은 곧 반역이나 다름없이 여기지므로 '''왕비를 한방에 날려버리는데는 간통죄만큼 효과적인 핑곗거리가 없기 때문'''이다. 게다가 앤 불린과 캐서린 하워드 모두 파격적이고 톡톡 튀는 매력으로 왕을 사로잡았는데, 이는 곧 두 사람 모두 당대 사회가 요구하는 정숙하고 얌전한 여성상의 '''통념에 맞게 행동하지 않았다는 의미이므로 혐의를 덮어씌우기에는 더욱 편리'''하기까지 했을 것이다. 그래서 둘 다 간통죄로 한방에 날려버렸고, 자기가 자초한 일이지만 이쯤되면 본인도 꽤나 지쳤을 것이다. 그래서 다음 아내(왕비)는 '''사고 안 칠 얌전하고 조용한 사람'''으로 맞아들였고, 사고를 안 쳤으니 이혼도 처형도 안 당하고 있다가 병으로 죽었다 볼 수 있을 것이다. 이 중 제인 시모어가 병으로 일찍 죽은 것은 불운이지만, 저 난리를 쳐놓고도 정신을 못 차리고 또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고 같은 실수를 반복한다|똑같은 짓을 반복한 결과]] 패턴의 반복이 나타난 것이다. 결국 헨리 8세에게는 양심만 없었던 것이 아니라 통찰력과 자기반성도 없었기 때문이라고 보아야 할 것. 덤으로 3의 배수 왕비의 사인이 두번 다 산후 질병인것 역시, 전근대에 출산은 그만큼 위험한 일이었음을 의미하는 것. * 이름도 캐서린 파를 제외하면 캐서린-앤-제인-앤-캐서린의 데칼코마니 현상을 볼 수 있다. 다만 캐서린이 절반인 것에서 알 수 있듯, 이 역시 유럽어권에서 사용되는 인명의 가짓수 자체가 그리 많지 않아 생긴 일이다. * 헨리 8세의 전신 초상화에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고간]]의 볼록 튀어나온 것은 [[코드피스]]라고 부르는 당대에 유행하던 패션이다. 본래 실용적 목적으로 만들었지만 나중엔 저렇게 [[패드|뽕]]처럼 쓰이게 되었다. 아들 [[에드워드 6세]]의 초상화에도 볼 수 있다. * 당시 영국의 상류층이었던 왕족들과 귀족들은 육식 위주로 과식을 하는 과시적인 식사를 했는데, 당연히 이는 건강에 좋지 않았다. 헨리 8세도 그가 먹는 식단에서 야채가 20%도 되지 않았다. 오히려 섬유질이 많은 [[야채]], [[생선]], [[빵]]을 먹던 서민층의 식사가 건강에 좋았다. 야채는 당시 상류층 사회에서는 '하층민이나 먹는 것'으로 취급당해 귀족들은 잘 먹지 않았지만, 사실 잉글랜드는 야채, [[과일]] 등의 생산도 부족하다 보니 야채와 과일을 충분히 먹을 수가 없었고[* 심지어 헨리 8세는 먹는 과일조차 당도가 매우 높은 달콤한 과일만 먹었다. 당도가 높은 과일을 지나칠 정도로 많이 먹으면 당연히 몸에 좋지 않다.] 결과적으로 상류층의 영양 섭취의 불균형을 초래했다. 헨리 8세가 50대에 승하한 것도 잘못된 식습관이 큰 원인을 차지한다.[* 다만 당시 기준으로 50대는 충분히 사망할만한 나이이기는 하다.] * 키가 '''188cm'''로 엄청난 [[장신]]이다. 오늘날에도 저정도 키면 전세계 어디를 가도 장신 소리를 듣는데 저 당시에는 말할 것도 없다. 근대 이전 키 [[180cm]] 이상인 군주는 흔하지 않았다. * 마상시합 관련 기록들의 경우, 신하들이 일부러 져 준 경우가 많다고 한다.[* 사실 이는 중세 유럽에서 흔한 일이었다. 왕을 이기면 왕에게 미운 털이 박혀 불이익 당할수 있기 때문이다. 거기다가 시합이 격렬해지다가 실수로 왕이 죽는 일이라도 일어나면 그래도 시합중에 일어난 일이니 살인죄나 반역죄로 처벌되지는 않겠지만 불이익의 정도는 더욱 강할 것이다. 실제로도 그런 [[앙리 2세|사례]]가 있기도 하고.] 심지어 [[프랑수아 1세]]와 연회를 열 때는 마상시합까지 열고 직접 참가하여 겨루었는데 두 왕이 쌍으로 지랄을 해서 신하들이 11번이나 연속으로 져 주느라 고생(?)했다는 기록도 있다. * [[프랑수아 1세]]와의 연회와 관련해서, 그에게 [[레슬링|메쳐졌다는]] 일화가 있다. 하지만 헨리 8세는 자신의 다리에 걸려 넘어진 것이라고 주장했고, 그의 신하들은 체면을 세워 주기 위해 그의 말이 거짓인지 사실인지도 모르고 헨리 8세의 승리를 선언했다. 심지어 일정에 없던 일기토를 먼저 요청한 건 헨리 8세 측이라는 기록도 있는데, 여차직하면 헨리 8세가 먼저 외교적 결례를 범한 셈이 될 수도 있다. 프랑수아 1세도 젊은 시절에 브르타뉴 지역의 레슬링 선수들한테 레슬링을 배웠기 때문에 뛰어난 레슬링 실력을 지녔다. 참고로 헨리 8세는 188cm의 엄청난 장신이였지만 프랑수아 1세의 키는 훨씬 더 큰 '''200cm'''였다. 레슬링을 배운데다가 체격까지 더 크니 당연히 헨리 8세가 질 수 밖에(...) * [[관심병]], [[연예인병]], [[왕자병]]~~실제 왕자긴 하지만~~ [[자뻑]] 등을 두루 갖춘 인물이기도 하다. 그래서 늘 대중의 인기에 민감해서 인기 관리에 치중했다고. * 의외로 들리겠지만 뛰어난 음악적 재능을 갖추어 작사 작곡을 많이했으며 튜더 시대의 대표적인 음악가로 꼽힌다. 《Henry VIII's songbook》이라는 당시의 악보집이 지금까지도 남아있으며 대부분이 그가 작곡한 음악으로 유튜브에 검색하면 전곡을 들을 수 있다. 유명한 악곡 <[[그린슬리브즈]]>도 튜더시대의 음악이라 그가 [[앤 불린]]을 위해 작곡한 것으로 생각하는 인식이 퍼져있었으나 학자들의 연구에 의하면 해당 노래의 스타일이 엘리자베스 1세 이후의 스타일이라고 하여 지금은 부정되었다. [youtube(cwm-7DclwpE)] * [[스탕달]]의 《[[적과 흑]]》을 보면 [[근세]] 말~[[근대]] 초 유럽에서 헨리 8세가 받았던 평가에 대해 알 수 있다. 평민으로써 사교계에 진입한 쥘리앙 소렐이 '사교계에서의 처신에 주의해야 할 사항'의 예시로 듣는 조언중에 '헨리 8세와 같은 인물을 괴물이라고 평가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 있다. 그 말을 듣는 상대도 십중팔구는 그렇다고 생각하겠지만, 왕당파 성향이 강한 사교계의 인물들로써는 어쨌건 평민출신인 쥘리앙이 어쨌건 군주인 헨리 8세에 대해 왈가왈부하고, 심지어 나쁘게 평가하는 것을 불쾌히 여길 것이라는 것. 중요한 것은 (이웃 국가인 프랑스와 영국의 라이벌 의식은 감안해야겠지만) '괴물[* 물론 이 괴물은 한국어에서 종종 쓰듯 대단하다는 경탄의 의미가 아니라 거의 순수하게 비판적인 의미에 가깝다.]같은 행적을 보인 군주'의 대표적인 사례로 손꼽힌 인물이 바로 헨리 8세라는 점이다. * 말년에 1544년 인쇄된 '시편 및 기도문'의 한 사본에 낙서를 끄적였던 것으로 확인됐다. [[https://m.yna.co.kr/view/AKR20230629070100009?section=international/all|#]]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